※ 시를 직접 낭송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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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행성 / 조용미

기억이라는 혹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그 대리석 같고 절벽 같은 견고함을 아시는지요
기억은 금강석처럼 단단합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사라지고 신성한
모든 것은 모욕당한다 했던가요 기억은 물이 되어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우리가
양육해온 모든 별들은 결국 부수어지고 말겠지요

기억은 지구를 반 넘어 채우고 있습니다 지구는 기억의 출렁이는 파란 별, 지구는 기억
이 파도치는 행성,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입니다 빙산이 녹아 해마다 기억
의 수위가 높아집니다 기억이 뛰어오르거나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에는 얼음이
덮이지요

수증기가 끊임없이 대기권 밖으로 빠져나가도 지구의 기억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다나 육지에서 증발한 기억은 구름이 되고 비와 눈이 되어 내리고
또 구름이 되고 바다로 가 다시 빗물이 되어 지상으로 스며듭니다 얼마나 많은 기억
들이 대기 중에 흐르고 있는지요

기억은 영상 4도에서 가장 무겁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온갖 기억의 파편들은 굳어버
리지 않고 얼음장 밑에서 헤엄쳐 다니며 살 수 있습니다 기억은 지구에서 가장 풍부
한 자원입니다 그러므로 지구를 기억의 행성이라 부르지요

그러나 지구 전체의 기억은 많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기억은 극히 적다는 사실을 알
아야 합니다 기억의 행성 지구는 사실 기억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그 견고한 기억도
대기 속에 사라지고 신성한 지구만 우주의 기억 속에 남게 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지구는 결국 변형된 기억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아주 모르고 싶은지요

출처 : 시집 『기억의 행성』 수록작, 2011, 문학과 지성사

[카詩(시) 메모]

열에 들떠 이 시를 썼던 어느 겨울 오후가 기억이 납니다.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은 지구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뻗어나갔습니다. 기억이 사라지면 우리의 몸도 어긋나겠지요. 기억이 파도치는 행성, 사막이 있는 푸른 별 지구에서 우리는 겨우, 그리고 크게 숨 쉬며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 뼛속의 칼슘과 핏속의 철분은, 태양이 생겨나기 전 은하계에서 폭발한 별들 속에 들어 있던 것이니 우리 몸이 곧 우주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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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시인 조용미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과 산문집 『섬에서 보낸 백 년』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다.